[정우] 사랑하고 있어요 #3. Unexpected(3)
호텔 로비에서 연주를 기다리는 정우는 애꿋은 핸드폰 화면만 자꾸 스와이핑 했다. 정우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화면 안의 털실뭉치 같은 알록달록한 공도 움직인다.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사실 안 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주는 너무나 쉽게, 아니 너무나 당연하게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누군가와 사적으로 저녁을 같이 먹는 것도 정우에겐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래, 그냥 밥을 먹는 거잖아.’
정우는 마음을 다 잡고 전화기를 자켓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려올 것으로 생각되는 엘리베이터 쪽을 계속 응시했다. 아래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일어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정우씨.”
정우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뒤엔 연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아주 작은 핑크색 핸드백을 들고 있는 그녀.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나, 저기.. 엘리베이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제가 앞쪽에 섰는데 뒤에 탔던 분들이 다 바로 위층에서 내리면서 저도 같이 내렸어요. 그리고 계단으로 내려왔죠.”
“아, 하하. 그랬구나. 난 자꾸 저기만 보고.. 하하.”
정우가 멎쩍은 웃음을 짓지만 그의 입술은 거의 광대뼈에 닿을 것처럼 올라간다. 정우는 스스로 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허둥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연주씨.”
“네?”
“그.. 되게.. 예쁘시네요.”
연주가 환하게 웃었다. 정우는 마치 호텔 로비에 조명이 밝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먼저 보았던 하늘색 원피스가 아닌 밤색에 레이스가 많이 달린 프릴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밝은 색을 입었을 때보다 더 조명 아래 빛났다. 짙은색 옷을 입은 터인지 그녀의 하얀 피부가 더 하얀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탄 차가 도로 위에 올라섰다. 저녁 시간이지만 여전히 밖은 환한 편이었다. 정우는 옆에 앉은 연주에게 자꾸 눈길을 주며 물었다.
“연주씨.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저 아무 거나 다 잘 먹어요.”
“그게 제일 어려운 메뉸데. 지금 딱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제가 사는 건데, 고르는 건 정우씨가 해야죠.”
연주가 바통을 정우에게 던진다. 그녀의 취향을 알리 없는 정우는 난감하기만 했다. 호주의 맛있는 바베큐를 먹을 수도 있지만 그건 연주가 입은 옷에 너무 냄새가 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베트남 쌀국수를 먹자니 그건 너무 분위기가 맞지 않았다. 사람도 북적거릴테고.
“혹시 일식 좋아하세요? 스시랑 초밥.”
“저 일식 엄청 좋아해요.”
“그럼 근처에 괜찮은 일식집 있는데, 거기로 모실게요.”
정우는 바로 경로를 설정하고 차를 몰았다. 몇 분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일식집에 도착했다. 평일 저녁이라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 정우의 마음을 조금 안심시켰다.
안쪽 테이블을 배정 받은 앉은 두 사람은 메뉴판을 열었다.
“이거, 한국어도 있어요.”
“네. 한국 익명들도 많이 오시니까요. 뭐 드실래요?”
“정우씨가 골라주세요. 제일 맛있는 걸로.”
연주가 메뉴판을 덮었다. 그녀는 물 한 모금을 가볍게 들이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식집 안에는 외국인들도 몇몇 있었지만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 유명한가봐요?”
“얻어먹는 건데 유명한 곳으로 와야죠.”
“그러셔야죠. 근데 다들 한국분들 같아요.”
정우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뒤 말했다.
“한국분들도 있는 것 같네요.”
“나 여기 와서 누구랑 같이 밥 먹는 거 처음이에요.”
“왜... 혼자 왔어요?”
정우가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연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가볍게 입가에 띄워보였다.
“남편은... 바쁘니까요.”
“그래도 저 같으면 연주씨 같은 사람 절대 혼자 안 보낼텐데.”
“왜요?”
“여자 혼자 다니는 거 위험하니까요. 누가 같이 있었으면 가방이나 전화기도 안잃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덕분에 이렇게 정우씨랑 같이 밥 먹네요. 전화기는 다시 사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혼자 오면서 무섭지 않았어요?”
정우의 질문에 연주가 웃으며 미간 사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조금요. 나 대학생 때 친구들이랑 태국 여행 다녀온 뒤로 한 번도 해외 안 갔어요. 못 갔다고 해야하나.”
“왜요?”
“바빴어요. 공부도, 일도. 그리고 결혼하고 나니까 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없잖아요. 애도 있고.’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예쁘겠네요. 연주씨 닮았으면.”
“나 별로 안 닮았어요. 원래 딸은 아빠 닮아야 잘 산대요.”
정우가 물을 한모금 마신 뒤 물었다.
“그럼, 연주씨도 아빠 닮았어요?”
“아뇨, 전 엄마.”
“어머니가 되게 미인이신가봐요.”
“울 엄마 저랑 똑같이 생겼어요. 저랑 엄마랑 언니랑 같이 있으면 큰언니, 작은 언니, 막내 동생 이렇게 봐요.”
“미녀 삼총사겠네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요.”
연주가 다시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호주는 예전부터 너무 와 보고 싶었는데 정말 기회가 안 생기더라고요. 이번에 공연 마치고 겨우겨우 시간이 났어요. 그래도 일주일 넘게 시간이 생겨서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무조건 호주 간다 하고 왔죠.”
“무계획이 때론 최고의 계획이죠. 잘 왔어요, 호주에.”
“흐흐. 와서 사고만 치네요. 저 사실 이틀 동안 호텔에만 있었어요.”
“그건 왜요?”
“괜히 겁나서요. 영어도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길도 모르고. 여기 오니까 택시를 타야하는지 지하철, 그 뭐라고 부르더라... 서브웨이 아니고.”
“트램.”
“아, 맞아요. 트램. 그거 타는 것도 잘 모르겠고. 아까 오페라 하우스 가는데도 엄청 헷갈렸어요.”
연주가 실수가 떠올랐는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보고 있으면 원래 긴장감이 더해지는 걸까? 정우는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다시 물로 축였다.
“그런데 소매치기 당했네요.”
“그러게요. 나 아까 진짜 너무 무서웠어요. 아무도 모르죠. 영어도 못하죠. 호텔은 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근데 갑자기 정우씨가 나타나서 나 정말 울 뻔했어요.”
“울었어요, 연주씨.”
“그렇게 우는 거 말고요. 나 울 때 진짜 어린애처럼 목 놓아서 울거든요. 근데 그럼 너무 창피할 거 같아서 꾹꾹 참은 거예요.”
연주가 히히 하고 웃는다. 연주가 웃을 때마다 눈이 조금 가늘어지며 자연적으로 예쁜 눈웃음이 나온다. 남자라면 그 눈웃음에 절로 기분 수치가 올라가며 같이 미소를 띄지 않을 수 없는 마성의 눈웃음이다. 정우는 그 눈웃음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르바이트 남학생이 메모지를 들고 다가왔다.
“5번이랑 6번. 그리고 9번 두 개. 이렇게 주세요. 아, 연주씨 음료 뭐 드실래요?”
“아뇨. 저는 그냥 물. 근데 정우씨. 조금 더 시켜요. 저 진짜 많이 먹어요.”
“그 몸으로 많이 먹는다고 하면 설득력이 없는데요.”
“아뇨. 저 운동도 정말 열심히 하고 기본 칼로리를 많이 쓰다보니 대사량이 엄청 나요. 나 먹는거 보면 놀랄텐데.”
“그럼...... 카츠동 하나 시킬까요?”
“네. 정우씨도 하나 더 시켜요.”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정우는 웃으며 카츠동 두 개를 추가했다. 텔레비전에선 가면을 쓴 남자와 어느 여성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우는 음악보단 눈 앞의 연주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연주는 그 화면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페라의 유령이네요. 오페라 하우스에서 했던 공연 같은데.”
“아, 그렇구나. 연주씨, 음악 좋아하나봐요?”
“흐흐. 저 성악 전공이에요.”
“아, 그랬구나. 생각도 못했어요.”
“다들 그래요.”
“그래서 오페라 하우스를 그렇게 와 보고 싶었던 거군요?”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냥 꿈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저 무대에서 꼭 노래해보고 싶었거든요.”
“궁금하네요. 연주씨 노래하는 거. 소프라노에요?”
“네. 맞아요. 정우씨도 음악 좋아해요?”
“좋아하죠.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
정우가 유들거리며 말했고 연주는 그런 그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웃음 한 번으로 실내가 다 환기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정우는 물컵을 채웠다. 몸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것 뿐인데 양 뺨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차가운 스테인리스 물컵의 뺨에 한 번씩 갖다댔다.
“더워요?”
“아뇨, 아뇨. 그냥 제가 좀 열체질이라서.”
“저도 열 많아요. 그래서 전 겨울이 좋아요.”
“연주씨 노래하는 영상 같은 거 있어요?”
“제 폰에 있었는데....... 잃어버렸네요.”
“기회되면 나중에 들어보고 싶네요. 한 번......”
막연한 기대일지도 모르지만 정우는 그렇게 넌지시 그녀에게 말했다. 연주는 정우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대중 앞에서 노래를 해본 적은 많지만 한 사람 앞에서 노래를 해본 적은 드물었기 때문일까? 연주의 입술이 끄트머리가 조금 올라간다. 그리고 눈썹 미간이 조금 위로 놀라가며 미소가 떠오른다. 수줍음을 느낄 때 그녀에게서 늘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정우씨는 무슨 일 해요?”
“아, 저는. 회사에서 프레젠터로 일하고 있어요. 물론 그것만 하는 건 아닌데.”
“프레젠터가 뭐에요?”
“그러니까. 어떤 회의에서 프로젝트나 안건에 대해서 발표하는, 대표로 발표하는 거에요. 그게 전부는 아니고,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회의도 하고....”
“어려운데요?”
연주의 미소와 함께 던져진 말에 정우는 뒤통수만 만지작 거릴 뿐이다. 그는 입술이 마르는지 다시 한 모금 물을 들이켰다. 그러다 사래가 걸려 고개를 돌리고 몇 번 기침을 했다.
“콜록. 크흠..”
“정우씨, 괜찮아요?”
“아, 네. 제가 가끔.. 크흠. 그러니까 저는 NPO 에서 일해요.”
“해외에서 오래 사셨어요?”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됐죠. 호주만 4년 째고... 예전엔 남아공에서도 살았고.”
“가족들은요?”
“가족들은 한국에 있죠.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손으로 자꾸 어딜 가리켜요? 한국이 그쪽이에요?”
정우가 등 뒤 대각선을 가리키다 연주의 말에 다시 손을 거둬들여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연주는 그런 정우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에 정우도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웃는다.
“아, 이게. 제가 발표하는 게 습관이 되서. 그러다 보니까 손짓이나 제스쳐가 많아지더라고요. 이상하죠?”
“아뇨. 알아듣기 편해서 좋아요. 발표 잘하실 거 같아요. 막 설득의 귀재 이런 거. 막 말할 때 긴장도 안 하실 거 같구.”
업무적인 일로 발표할 때는 그렇다. 하지만 연주 앞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는데 긴장하는 자신을 보며 정우는 입맛을 가볍게 다셨다. 이성보다 감성이 더 영향력이 큰 걸까?
“연주씨는 한국 어디 사세요?”
“저는 일산이요.”
“그렇구나. 저는 고향은 울산이에요.”
“전 고향 부산인데. 우리 멀지 않은 동네에 살았었네요.”
그때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12개짜리 모듬 초밥에 작은 참치회, 그리고 새우를 얹은 초밥. 마지막으로 가츠동 두 접시에 소바 장국이 날라져왔다. 일식집답게 깔끔한 음식이 정우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정우는 숟가락과 나무로 된 젓가락을 빼서 티슈에 말아 연주 앞에 놓아주었다.
“맛있겠다. 여기 음식 정말 깨끗하네요.”
“여기 되게 맛있어요. 드세요.”
“제가 사는 건데, 정우씨 먼저 먹어요.”
“네.”
정우가 젓가락을 들어올리며 웃어보였다. 정우는 연주 앞에 있는 간장 종지를 가져다가 와사비를 풀어 가볍게 저어서 연주에게 건네주었다. 자신의 것도 준비하고 참치회를 한 점 들어올렸다. 평소 와사비의 톡 쏘는 맛을 좋아하는 정우는 참치회를 간장에, 특히 와사비가 많이 묻을 수 있게 듬뿍 담근 다음 한 입에 집어넣었다. 짭짤한 간장 맛에 코 끝을 찡하게 하는 와사비의 향이 정우의 입 안을 메웠다.
“진짜 맛있네요. 연주씨도 먹어봐요.”
연주 역시 참치회를 들어 간장에 살짝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 안에 고 오물거리더니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참치회가 연주의 입에 딱 맞았다.
“와, 한국에서 먹던 거랑 다르네요. 맛있다, 정말. 정우씨, 여기 자주 와요?”
“가끔. 혼자 사니까, 일 마치면 한 번씩 오게 되더라고요. 아, 이 동네 말고 집 근처에.”
“집은 어딘데요?”
“저는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한국 분들 많이 사는 곳.”
“이젠 젓가락으로 가리키는 거예요?”
연주가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뇨. 이게, 이거 잡을려고요. 새우. 이게 되게 먹음직하다.”
연주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폭소를 터트렸다. 정우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젓가락에 애처롭게 매달린 새우초밥을 입 안으로 가져가 씹었다. 새우 초밥보단 사실 새우튀깁 초밥이 정우의 식성에 맞지만, 새우도 나쁘지 않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음식을 입가로 가져갔다.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식당 내의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연인의 향기를 풍기는 두 사람의 남녀일 뿐이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격없이, 그리고 즐겁게 웃어본 기억이. 가끔은 인생이 게임과 같아서 F2를 누르면 지금의 이 순간이 저장되고, F4를 누르면 그때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 하는 실수를 고쳐가고 조금 더 완벽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하지만 정우는 금방 생각을 고쳤다. 고전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보며 정우는 정말 즐거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영화. 하지만 다섯 번을 보고 나서 그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취향도, 좋아하는 색깔도, 성적 취향마지도 다 알게 되고, 나 자신조차 그 사람에게 맞게 모든 걸 갖춰서 사랑을 얻어도...... 사랑을 얻고 나면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눈을 떠도 다시 2월 2일 성촉절이었지만, 사랑을 얻은 뒤에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면, 여전히 눈으로 뒤덥힌 바깥이지만 이제 자동 달력은 2월 3일을 표시한다. 이젠 인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2월 3일부터는 다시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로 돌아온 것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 빌 머레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깐의 상념 이후 정우는 현실로 돌아왔다. 저장할 수 없어도 좋다. 지금 이 순간 눈 앞의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정우의 입가에, 그리고 연주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저 정말 많이 먹죠?”
접시는 이미 모두 비어 있었다. 가운데 두었던 세 접시 말고도 연주의 카츠동을 담았던 그릇도, 그녀의 소바 장국도 조그맣게 잘린 녹새 파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연주는 괜시리 민망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잘 먹으니까 좋은데요, 뭘. 전 잘 먹는 사람이 좋더라고요.”
“남자들은 말은 그렇게 하는데 살 찌는 건 싫어하잖아요? 너무 뻔한 거짓말 같아.”
“먹는 거랑 살 찌는 거랑은 다른 문제니까. 연주씨는 그렇게 먹어도 날씬하잖아요.”
연주가 눈을 찡긋하며 팔을 가볍게 접어 팔뚝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크지는 않지만 보기 좋은 작은 알통이 도드라진다.
“나 운동 열심히 해요. 저 팔굽혀 펴기 한 번에 서른 개나 하는데.”
“무릅 꿇고?”
“아뇨. 정식으로. 아마 제 자세가 정우씨 자세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트레이너 선생님도 남자보다 자세 좋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원래 성악하시는 분들은 조금 몸집이 있지 않아요? 외국분들 보면 대부분 그런 거 같던데.”
“안 그런 사람도 있잖아요. 조수미.”
그녀의 말에 정우는 조수미를 떠올린다. 그랬던가? 그렇게 너무 유명한 사람은 도리어 정우에게 너무나 먼 사람이다. 사실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에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고마워요. 맛있는 곳에 데려와 줘서.”
“지금까진 뭐 드셨어요?”
“그냥 호텔 뷔페랑 레스토랑에서 먹었는데 맛이 별로였어요.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먹는 것도 그랬고.”
“사람들이 말 많이 걸었을 것 같은데요?”
“내가 대답을 못하니까 몇 번 말 걸더니 그만 두더라고요.”
“이야기 많이 해요. 제가 다 들어줄게요.”
정우의 말에 연주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우씨. 아무한테나 다 친절하고 그렇죠? 막 남이 부탁하면 거절 못하고 다 들어주고. 성격 되게 그럴 거 같은데.”
“아, 그건 아닌데. 누가.. 부탁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누가 부탁하면 들어주는데요?”
잠시 말이 없다. 정우는 물끄러미 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눈이라는 캔버스에 담기라고 할 것처럼 그는 그녀를 응시하며 머릿 속에 그녀를 그린다. 그맇고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눈을 크고 쌍꺼풀이 짙고요. 귀가 작고. 머리카락은 생머리인데, 숱이 너무 많지는 않아서 머리가 작아 보이고.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귀가 살짝 보이고...... 코는 아담하고, 입술은 분홍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그럼 사람이 부탁하면 거절 못하죠.”
“그거 나에요?”
“아마도. 그런 거 같죠?”
정우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연주의 눈이 가늘어지며 새초롬한 눈웃음이 도드라진다. 티슈를 들어 입가를 한 번 더 닦아낸 연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화장실 좀.”
“저쪽이에요.”
연주가 정우의 등 뒤로, 그 쪽으로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라져갔고, 정우는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끝자락이 모퉁이 벽 뒤로 사라졌을 때 그는 다시 하마터면 돌아가버릴 뻔했던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연주는 손을 씻고 물기만 조금 털어낸 손을 두 뺨으로 가져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 떄문에 긴장해서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피곤해서 몸살기운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연주는 손에 물을 조금 붙여 살작 나온 사진의 광대에 톡톡하고 갖다댔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정우가 눈치챈 것은 아닐까, 한편으론 우습지만 그런 감정을 갖는 자신이 대견하기만 했다.
‘너 아직 한창이네, 하연주.’
손을 뻗어 화장지를 뽑아 물기를 닦아냈다. 밥을 많이 먹은 탓인지 윗가슴이 조금 답답한 기분이었다. 연주는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작은 핸드백에서 팩트를 꺼내 다시 뺨에 톡톡 두드려 주었다.
거울을 보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넣었다 다시 벌렸다를 반복했다. 짙은 쌍꺼풀 진 눈도 깜빡거려본다. 어떻게 하면 예쁘게 웃어질지 연습을 해보던 그녀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연주. 너 지금 뭐하니? 정신 차리자.”
그녀는 세면대에 두 손을 대고 거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또 그러면 안 되잖아. 그치? 연주야. 바보같이 굴지 말고.”
그녀는 자신의 뺨을 두어번 두들겨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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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즐거운 저녁 시작하셨나요?
다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P.S 오디오 영화(?)를 제작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 여성 분이 계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여자 성우가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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